포퓰리즘과 격변의 시대, 노로돔 시아누크의 미지의 끝에 숨겨진 이야기

노로돔 시아누크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의 국왕.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20세기 이후 현대 입헌군주제나 왕정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의 국왕임을 감안하더라도 사실상 전제정 독재정치를 했던 인물이지만, 폐위 후에 캄보디아 전역을 피로 물들이며 대학살을 펼친 어느 인간백정의 엄청난 학살극으로 인해 다소 묻힌 감이 있다. 생애 시아누크는 1922년 캄보디아 왕가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는 왕이 되기에는 까마득할 정도로 혈통이 멀었던 사람이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전부 차지해버리자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는 1941년 시아누크를 꼭두각시로써 캄보디아의 왕으로 만들었다. 즉, 외할아버지인 캄보디아 국왕이 사망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18살의 나이에 왕이 된 것이다. 시아누크는 여러명의 부인을 가져 그들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낳으며 놀고 먹는 생활을 해댔다. 그래서 그는 마치 프랑스의 뜻대로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왕으로 지내는 듯 했지만 이 왕이 훗날 캄보디아를 휘저어 놓을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재빨리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했으나 일본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나자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1946년에 민족주의 성향 정당인 '캄보디아 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자 그는 프랑스와 결탁해 선거결과를 무효화시켰고, 민족의회를 무력화시켰다. 그러다가 선 응옥 타인의 민족주의 무장단체 '크메르인민자유위원회'(KNLC)와 좌익 혁명단체 '크메르인민혁명당'(KPRP)으로부터 도전을 받자 1953년 1월에 계엄령을 발동시켜 의회를 해산하는 한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고 있던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냈고, 캄보디아 국민은 그런 그를 '캄보디아의 혼'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독립 뒤 아버지에게 왕위를 주고 왕위에서 물러난 그는 '상쿰'(...